경기 양주 감악산 임꺽정봉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

2023. 1. 10. 21:21카테고리 없음

임꺽정에 관한 이야기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임꺽정이 백정이라 해서 소, 돼지를 잡는 쇠백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임꺽정은 유기장(柳器匠)이라고도 불리었던 고리백정이었다.

고리백정은 키버들(버드나무과의 나무)을 이용하여

키나 바구니 등 살림살이 용도의 세공 용품을 만드는 백정을 말한다.

홍길동,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도적

임꺽정은 명종 14년인 1559년 황해도 구월산 등을 근거지로 도적떼를 일으켰다.

황해도 재령, 해주, 구월산, 평안도 성천, 양덕, 맹산, 강원도 이천 등지를 휩쓸었다

설인귀굴 이라고도 한다.

신라를 도와 고구려를 정벌하러 온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 동굴이다.

일명 임꺽정굴로 불리기도 한다.

설인귀굴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깊은 만큼 어두워 내려갈 수도 없다.

줄을 묶어 놓았으나 위험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출생과 성장에 대한 의문이 많은 설인귀(薛仁貴)인데,
중국보다 적성 일대에 전설이 많은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설인귀는 감악산에서 무술을 익혔으며, 당나라로 가서 고구려를 쳤고,
후에 이를 자책해 죽은 뒤 감악산 산신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고 한다.
말을 타고 달렸대서 설마치(薛馬馳),
눈 쌓인 감악산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익혔다 해서 설마리(雪馬里)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감악 산사는 민간에 전하기를 신라가 당나라의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고 있다
(紺岳祠諺傳 新羅以唐薛仁貴爲山神)”고 하였다.

임꺽정굴은 응암봉 아래에 있다 하여야 맞다.

6~7m로 꽤 깊다.
굴의 모습은 수평이 아니라 거의 수직 형태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해서 ‘설인귀굴’, 임꺽정이 숨었다고 해서 ‘임꺽정굴’이라고도 한다.  

 

 

광복산

강원도 평강군 유진() 이천군 방장(), 용포() 사이 있는 .

높이는 1,123미터이다.

이곳에서도 머물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고석정(강원 철원)

고석정 입구에  임꺽정 동상

고석정(孤石亭)은 신라때부터 명승지이지만,

조선시대 의적으로 불린

의적 임꺽정이 이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다고 전하며,

건너편 산등성이를 따라 석성을 쌓고 자연 동굴에 은신했다고 합니다.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이곳을 통과하여 조종에 상납할 조공물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하는등..

부패한 사회계급에 항거 하였다.

임꺽정은 때로 변신술을 부렸는데,

관군이 몰려오면 꺽지로 변해 물속에 숨었다고 하며,그 모습을 보고 "꺽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탄강 일대에 은신하다가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고관대작의 재물을 훔쳐 백성에게 나눠줬다고 전합니다.

 

 

사패산(경기 의정부시)

호암사 뒤로 돌아 올라가면 호랑이굴로 백명이 피신할 수 있다는 백인굴이 나온다.

백인의 백사람이 아니라 하얀호랑이 "白寅"

이곳의 골자기 이름이 범골이고, 범이 살던 굴 이름이 범굴이고,

굴이 있는 봉우리 모양의 큰 바위가 호암(虖巖)이라 해서 절이름이 호암사(虖巖寺)라 한 것 같다.

백인굴은 임꺽정의 산채, 박쥐굴, 허준굴 등으로 불렸다고 하나,

이곳은 호랑이가 은거할 만큼 산림이 우거진 오지로 도적의 소굴로 안성마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임꺽정의 책사 서림이 사패산 아래 큰장터인 하누원에서 잡혔다고 하는 점 등을 고려시,

임꺽정의 산채란 얘기가 설득력이 있으며,

이곳 백인굴은 예전에는 산객들이 다녔다고 하는데 지금은 막아놓아 다닐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천마산(인천시)

인천부평 구술원 인근에 검술을 잘하는 화적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된 임꺽정은 검술을,

배우고 싶은 생각으로 양주를 떠나 부평으로 찾아간다.

그가 찾아간 곳은 아마도 당시 도쩍떼들이 많았던 계양산의 경명현(징매이고개)일 것이다.

이곳은 오죽하면 천명고개,백명고개라 불렸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지 않으면

화적들에게 화를 입을 정도 였으니 말이다.

계양은 예로부터 평야지대로 곡식이 많고 소금을 운반하는 통로의 중신이었기에 도적떼가 많았다고 한다.

바로 그 근거지가 징매이고개 부근 이었을 것이다. 

 

 

칠장사(경기 안양시)

임꺽정의 무대이기도한 칠장사

칠장사는 임꺽정의 스승인 병해대사를 만나 이봉학등과 의형제를 맺은곳이다.

병해대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법을 가르쳐 백성들의 생활을 도왔다

가죽신이 안성유기와 더불어 안성특선물이 되기도 하였다.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때 관군들을 피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임꺽정 토벌에 토포사(討捕使·도적이나 반란세력을 토벌하는 임시 책임자) 남치근이 나섰다.
관군은 구월산을 에워쌌다.
관군 틈에서 서림이 길 안내를 했다.
임꺽정은 촌가로 숨어들었다.
관군 차림으로 변장하고 뛰쳐 나가면서 소리쳤다.
“임꺽정은 도망갔다”. 관군은 우왕좌왕했다.
그때 서림이 외쳤다.
“임꺽정이다!” 임꺽정을 향해 화살 수백 발이 날아들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1562년 1월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구월산에서 항전하다 끝내 서울로 압송·사형 당했다.
1562년, 반기 들고 일어선지 3년 만이었다.
 
 
임꺽정의 반란은 1559년에 시작되어 1562년 1월까지 무려 3년간이나 지속되었다.
한 개인의 주도로 진행된 민란이 이렇게 오래도록 이어진 경우는 드문 예로,
이는 권문세가의 재산을 빼앗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 준
임꺽정의 의적 활동과 소규모의 게릴라 전투 방식,
나아가 일반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